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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글 Lv. 3

역사속에 기억 될 신발들


우리가 흔히 쓰는 비유중에 "헌신짝 처럼 버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쓰이는 상황에 따라 "헌신짝"의 의미가 조금씩 다르겠지만 대개 '아무 쓸모가 없는 물건' 정도의 의미를 갖는 비유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헌신짝도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들에게 큰 의미를 주고 심지어는 역사속에 길이 남아 오래도록 기억되기도 하나 봅니다.

지난 금요일인 1월 2일 미국 플로리다 마이애미의 한 고속도로에서는 (Palmetto Expressway) 밤새 누가 버렸는지 알 수 없는 수만켤레의 "헌신발짝"들이 길을 막아  출근길이 두 시간이나 정체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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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 순찰대가 출동해서 경위를 조사했지만 그 많은 헌 신발을 고속도로에 흘렸다는 사람도 없고 사고의 흔적조차 없어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밝힐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혹시 새벽에 헌 신발들을 싣고 가던 화물트럭의 적재함이 열려 쏟아진 것일 수도 있지만 이 사건이 저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어제 토요일(1월3일) 영국 런던에서 벌어진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시위대의 사진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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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무자비한 가자지구 공습을 규탄하며 이스라엘 대사관을 향해 행진하던 12,000여 명의 시위대는 "부끄러울 줄 알아야지~ 내 (정의의) 신발을 받아라~("Shame on you, have my shoe")라고 노래 부르며 이스라엘 대사관을 향해 신발을 던져 1,000 켤레가 넘는 신발들이 도로위에 쌓인 것입니다.
물론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이것은 지난 12월 이라크를 깜짝 방문한 부시 미국 대통령을 향해 한 기자가 신발을 던진 것을 패러디한 것으로, 이라크를 침략한(?) 미국에 대한 항의 표시가 무자비한 공습에 이어 지상군을 투입해 가자 지구에 진군한, 이스라엘에 대한 규탄의 표현으로 발전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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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운동 신경으로 첫번째 신발을 가뿐히 피하고 두번째 신발을 기다리는 부시 미대통령


만약 플로리다 마이애미 고속도로에 버려진 그 신발들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이 이스라엘의 정당한 자위권 발동'이라는 말로 정당성을 부여한 부시대통령의 친이스라엘적 논평에 대한 항의로 누군가 벌인 일이라면 이라크에서 그 기자가 던진 신발 한 켤레는 단순히 발 냄새나는 헌신짝에 머물지 않고 세계인들에게 어떤 종류의 영감(?)을 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아이러니 한 사실은 미군이 이라크 국민들의 해방을 내세우고 침공해 후세인을 축출했던 2003년, 끌어내린 후세인 동상의 뺌을 때리던 이라크 국민들의 신발이 5년 뒤에는 다시 미국 대통령인 부시에게 날아갔다는 것입니다. 이 일에는 이라크의 종파에 얽힌 복잡한 사연이 내재되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라크와 미국이라는 나라만 놓고 보면, 역사속에서는 신발도 부메랑처럼 돌고 돌아 날아 다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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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어내린 후세인 동상에 신발로 따귀를 때리는 이라크인들.


사실 역사 속에는 부시에게 날아간 그 신발처럼 "헌신짝"이라는 초라한 신분의 굴레(?)를 초월해 세계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되는 불멸의 존재가 된 신발들이 꽤 있습니다. 
유치원생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을, 기차를 타다 실수로 한쪽 신발을 떨어뜨리자 다른쪽 신을 벗어 근처에 던져 두었다는 간디의 신발은 "비폭력"으로 영국의 폭력에 맞서 인도 독립을 쟁취하려했다는 간디의 업적을 후광으로 업고 앞으로도 두고 두고 회자 될 영생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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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로 신발을 잃으신 맨발의 간디


간디가 이렇게 해서 신발을 잃은 후 평생을 맨발로 지내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신발도 없이 옷 한벌만으로 지냈다는 간디와는 대조적으로 3,000 켤레가 넘는 신발을 가지고 있었다고 알려져서 화제가 된 경우도 있습니다.

1986년 국민들의 부정부패 척결과  민주화 요구 시위를 피해 망명했던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와 부인 이멜다는 대통령 궁에 15벌의 밍크코트, 508벌의 가운,888개의 핸드백과 더불어 (실제로는 3000개가 아니라) 1220 켤레에 달하는 신발을 남겨 놓아 전 세계인들에게 극에 달한 사치의 표상으로 알려진 일도 신발이 역사속에 화제가 된 유명한 일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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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모은 자신의 신발들로 연 신발 박물관을 돌아보는 이멜다 (From: http://news.bbc.co.uk/2/hi/asia-pacific/1173911.stm)


신데렐라는 한 켤레도 아니고 유리 구두 한짝만으로도 단번에 시녀에서 왕비로 신분의 수직 상승을 이루었는데, 이멜다는 1,000여 켤레가 넘는 신발을 가지고도 영부인 자리에서 쫓겨난 것을 보면 역시 "양보다는 질!!"이라는 소중한 교훈을 되새기게 되는 좋은 역사적 일화 인 것 같습니다.

제대로 된 신발 한 짝이 수백 켤레의 신발들보다 더 강하다는 실증적인 예는 이 뿐만이 아닙니다. 냉전이 극에 달했던 1960년 10월 12일 유엔 총회에 참석했던 구 소련의 최고 권력자, 후르시초프(Kruschev) 서기장은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에 이은 동유럽에서의 세력 확장을 비난하는 필리핀 대표의 연설에 대해 “빌어먹을 제국주의 하수인, 꼭둑각시 같은 놈"("a jerk, a stooge and a lackey of imperialism".)이라고 소리지르며 자신의 오른쪽 신발 한 짝을 휘두르며 책상을 마구 마구 내리치는 이해 못 할 행위예술과도 같은 황당한 일을 벌여 세계인의 머리속에 자신의 이름을 깊게 아로새기는 일을 벌입니다. (신발로 책상을 내려쳤다는 일화에는 여러가지 반론이 있으나 최소한 신발을 들고 휘둘렀던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참고자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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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총회중에 신발을 보듬으며 전의를 불태우던 후르시초프 서기장(From:http://www.nytstore.com/ProdDetail.aspx?prodId=2391)


냉전체제에서 미국과 경쟁하며 함께 세계 1,2위의 강대국 지위를 구가하던 소련의 최고 지도자라고는 하지만 전 세계 각국의 대표가 모인 유엔총회에서 저런 막 가자는 행동을 한 것을 보면 후루시초프의 베짱은 대를 이어 이라크를 거침없이 쳐들어 갔던 부시 부자를 능가하는 엄청난 경지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역사속에서 신발 한짝은 인격이나 사치의 표상 또는 후루시초프처럼 막가는 베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수단으로 기억되기도 하지만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행동의 변화를 요구하는 실질적인 개기가 되기도 합니다.

2001년 9월 미국 뉴욕 맨하튼의 무역센터 빌딩에 여객기가 충돌해 붕괴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그해 12월 22일,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 마이애미로 향하던 비행기에 탑승하고 있던 영국 국적의 리차드 레이드(Richard Reid)는 자신의 신발속에 감추어진 플라스틱 폭약을 터뜨리기 위해 도화선에 불을 붙이다 승객들과의 몸싸움 끝에 체포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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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폭약이 장치되어 있었다는 Richard Reid의 신발(From: http://www.jamd.com/image/g/699330)


일설에는 리차드 레이드가 발에 땀이 많이 나는 체질이라 신발 밑창에 감추어진 플라스틱 폭약의 신관에 연결된 도화선이 젖어 불이 잘 붙지 않았다고도 하는데 아무튼 이 일로 리차드 레이드(Richard Reid)는 상용 항공기를 폭파하려 했다는 죄로 종신형을 선고 받고 형무소에 수감됩니다.
하지만 이 일의 파장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 사건을 개기로 미국에 착륙하는 비행기에 탑승하는 모든 승객들은 신발까지 벗고 금속탐지기를 통과해야 하는 불편을 겪게 됩니다.대부분의 승객들에게도 번거로운 일이지만 특히 무좀 환자들에게 인기있는 발가락 양말이나 구멍난 양말을 신은 사람이라면 쏟아지는 주변의 시선에, 쑥스러움을 함께 견뎌야 하는 이중의 불편을 겪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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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난 양먈로 망신 당한 World Bank 총재 Paul Wolfowitz(http://www.nypost.com/seven/01312007/business/hole_y_bank_prez__business_.htm)


단 한 사람의 폭탄테러 시도로 미국내 비행기를 이용하는 모든 사람이 오래도록 길게 줄을 서 신발을 벗고 검색을 하고 다시 신발을 신어야 하는 일은 신발이 역사 속에서 더 이상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직접적인 불편의 개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역사 속에는 우리가 "헌신짝"이라 부르며 하찮게 여기는 신발 한 켤레, 한 짝이 수 많은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긴 여운을 남기며 영향을 미치는 일들이 많이 있는 걸 보면 다 떨어진 허름한 신발이라도 버리기 전에 다시 한번 눈길을 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혹시 또 아나요? 오늘 버리는 헌 신발 한 켤레가 역사에 남을 사건의 주역이 될 지...



 


참고자료
http://www.time.com/time/magazine/article/0,9171,961002-2,00.html
http://www.iht.com/articles/2003/07/26/edtaubman_ed3_.php
http://www.newstatesman.com/200010020025
http://www.time.com/time/world/article/0,8599,203478,0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