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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기술

윤활유 WD-40의 재발견


가지고 있는 카메라 중에 Rollei 35라고 하는 오래된 카메라가 있습니다.
독일에서 1966년 처음 생산되기 시작해서 싱가폴로 옮긴 공장이 1982년 문을 닫을때까지 생산됐으니 그 후 드문 드문 한정판으로 발매된 기념 모델이 아니라면 아무리 최신 모델이라도 최소 26년은 된 좀 오래된 카메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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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이젠 김상경,김지수가 부럽지 않습니다."라는 글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하나 갖고 싶은 걸 참고 있었는데 이 카메라가 소품으로 등장한 영화 두편 때문에 지름신이 강림하사~ 각각 기종과 생산지가 다른 모델 4개를 차례차례 사들이게 되었습니다.
생산된지 오래된 카메라이다보니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구입하자마자 바로 필름을 넣고 사진을 찍기에는 문제가 있는 물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전자 부품이라고는 바늘로 된 노출계 하나 밖에 없는 기계식 카메라이다 보니 간단한 고장은 고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아 많은 분들이 손수 수리를 해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 중 가장 흔한 고장이 1/30초 이하의 저속 셔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문제인데 제가 구입했던 4대 중에서 2대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생산 된 지 35년쯤 된 싱가폴 제품은 필름을 넣지 않고 열심히 공셔터를 남발하자 기름이 말라 뻑뻑해진 톱니바퀴가 풀려 정상 작동이 됐지만 그것보다 조금 더 오래된 독일산 제품은 아무리 공셔터를 눌러도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 상태가 조금 더 안 좋은 듯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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뻑뻑해진 저속 셔터를 제대로 작동하게 하기 위해서는 톱니바퀴에 조금 칠해줄 윤활유가 필요했지만 카메라 수리에 쓸 고급 윤활유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시계 수리에 쓰는 고급 윤활유야 구하려면 구할 수는 있었지만 개미 눈물(?)만큼만 쓰자고 큰 통을 하나 다 사기가 아까와 대체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궁리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라고 했는지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이 저 말고도 또 있었던 모양입니다. 유명한 해외 사진 커뮤티티인 http://photo.net에 어떤 사람이 WD-40를 카메라 수리에 쓸 수 있다는 글을 올려 놓았더군요. 이 사람의 주장은 WD-40가 그 자체로는 고급 윤활유는 아니지만 먼지가 엉겨붙는 파라핀과 기타 불순물들만 제거하면 상당히 순도 높은 윤활유로 쓰일 수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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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용 윤활유의 대명사 WD-40


안그래도 공구통 안에 있던 WD-40를 쓰고는 싶었지만 WD-40에는 먼지가 달라 붙는 성질이 있어서 망설이고 있던 저에게는 눈이 번쩍 뜨이는 이야기였습니다. 당장 그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실험실에서 쓰는 시험관에 WD-40를 적당히 담아 조용한 곳에 며칠을 두었더니 두층으로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1953년 Norm Larsen란 사람이 아틀라스(Atlas:대륙간 탄도 미사일의 발사체로 개발됐으나 후에 미국 최초의 유인 우주선인 머큐리 우주선을 발사하는데 사용) 로켓 표면의 수분을 제거하는 부식 방지제를 만들기 위해 연구하던 중 40번째 성분배합이 성공했다고 해서 WD-40(Water Dispersant, 40th formula)란 이름이 붙은 것처럼, 이 윤활유는 여러가지 화학성분들이 혼합돼 있는 혼합물입니다. 대략 석유에서 뽑은 솔벤트나프타(Solvent naphtha: 용제 나프타) 60%정도에 석유를 정제해서 얻은 유동파라핀 20%정도를 주성분으로 하고 부식방지제와 습윤제(wetting agent)와 기타 화합물들을 혼합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원심분리를 하거나 오래 정치시켜두면 비중차이에 의해 상대적으로 무거운 파라핀성분이 밑으로 가라앉아 층으로 분리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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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층으로 분리된 WD-40


분리된 WD-40의 윗층을 조금 찍어 카메라의 톱니바퀴에 바르고 공셔터를 몇번 눌러줬더니 신기하게도 40여년 묵은 카메라가 스르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며칠 기다리는 것을 못참아 그냥 WD-40를 사용한다면 당장은 작동하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먼지가 달라붙고 톱니바퀴가 더 굳어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카메라나 시계같은 정밀기계장치에는 WD-40를 절대 그냥 쓰면 안 됩니다.

일상생활에서 삐걱거리는 경첩을 조용히 잠 재우거나(?) 녹이 슬어 뻑뻑한 공구나 나사를 풀기 위해 사용하는 WD-40는 이외에도 뜻밖의 용도로도 요긴하게 쓰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크레용이나 매직으로 벽에 한 낙서를 지우기 위해서는 페인트 희석제(신너)를 쓸 수도 있지만 WD-40를 뿌리고 스며들기를 조금 기다렸다가 문지르면 신기하게 잘 지워집니다. 그리고 도로 포장하는 공사장을 지나다 차에 묻은 타르도 WD-40를 뿌리고 닦아내면 쉽게 지울 수 있습니다.
신발 밑창에 달라붙은 껌도 WD-40를 뿌리고 잠시 기다렸다가 떼어내면 흔적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떼어 낼 수 있습니다.
반지나 유리병에 손가락이 끼었을때도 비눗물 대신 더 쉽게 표면에 퍼지는 WD-40를 사용하면 아프지 않고 쉽게 손가락을 뺄 수 있습니다. 물론 손가락을 뺀 후에는 손에 붙은 WD-40를 꼭 씻어 내야 겠지요.
또 쓰다남은, 락카라고도 불리는 스프레이 페인트의 노즐이 막혔을때 분사 노즐을 빼서 WD-40 깡통에 달고 몇번 눌러주면 페인트가 굳어 막혔던 구멍이 뻥~ 뚫려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윤활유인 WD-40의 용도는 이것들뿐만이 아닙니다. 파리나 구더기 같은 벌레가 꼬이는 쓰레기통에 WD-40를 뿌려두면 이 안에 포함된 방향성분때문에 벌레들이 꼬이지 않게 되고 덩달아 쓰레기통을 뒤지는 개나 고양이도 막을 수 있기 때문에 쓰레기통 주변을 깨끗이 유지하는데도 쓸 수 있습니다.
또 오래도록 쓰지 않아서 뻣뻣해진 가죽 샌들이나 가죽 신에 WD-40를 뿌리면 부드러워져서 편하게 신을 수 있습니다. 단 WD-40를 뿌리면 가죽표면이 물에 젖은 것처럼 색깔이 진해지기 때문에 색이 변하는 것을 원치 않으면 사용하지 않는게 좋을 듯 합니다.
미국 경찰에서는 나이트 클럽이나 술집의 화장실에서 마약인 코카인의 흡입을 막는데도 WD-40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코카인을 흡입하는데 흔히 사용되는 화장실의 세면대 위나 평평한 곳에 WD-40를 살짝 뿌려두면 WD-40안의 화학성분과 코카인이 반응해서 젤 상태의 덩어리로 엉겨 버려 마약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마 Norm Larsen이 처음 아틀라스 로켓 표면의 부식과 녹을 방지하기 위해 WD-40를 개발했을때만해도 이렇게 다양한 용도로 자신의 개발품이 쓰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50여년의 시간동안 이렇게 다양한 용도로 사람들에게 많은 편리함을 주었으니 참으로 고마운 물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