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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륜 유쾌한 행복론

어제 낮, 강의가 비는 시간에 교보문고에 들러 책을 몇 권 샀다.

그중에 한 권이 지난번에 읽고 싶어했던 전시륜의 어느 무명 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

다른 때 같으면 곯아 떨어졌을 기차안에서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를 참지 못하며 읽다보니 벌써 대전.

한꺼번에 다 읽기가 아깝다.

조금씩 오래도록 읽고 싶은 생각이 든다.

아주 썩 훌륭한 철학을 이야기 한 것도 아니고 커다란 삶의 지혜를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신에 대해 자유롭게 삶을 산 한 사람의 생을 엳 볼 수 있는 것 같아 유쾌하다.

더구나 너무나 높고 맑아, 내가 이를 수 없을 것만 같은 추상적이기까지 한 명상록들과는 달리

너무도 솔직한 생활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친근하다. 그리고 그 연륜에 걸맞는 적당한 혜안까지...

굳이 법정스님의 글에서 읽은 것처럼 요약하자면 스스로에 만족할 수 있는 삶에서 행복할 수 있다...정도가 되겠지만

그렇게 관념적으로 이 책을 박제시켜 버리고 싶지는 않다.

어쩜 내게는 법정스님의 글 보다도 마음에 와 닿는다고나 할까...

저자가 이 책 한권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무척이나 아쉽다.

제목처럼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 2편,3편이 있으면 좋으련만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이 되어 버렸으니...

어제 산 전시륜의 유쾌한 행복론 중에서 제일 처음 나오는, 작자가 54살에 썼다는 유서가 무척 흥미롭다.

그가 폐암 수술을 하고 10여년 밖에 더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고 쓴 그의 유서...

부인과 남은 자식들에 자신의 사후 이야기와 인생에 대한 충고를 쓴 내용

나보다 세상을 먼저 산 어떤 한 사람의 삶의 모습이 배어 있는 듯.

이 책 전체에 나오는 지은이의 목소리가 그의 유서에 모두 드러나 있는 것 같아 옮겨 본다.


전시륜의 유언서

미국의 사회보장번호 403-56-4689를 소유한 본인, 전시륜은 다음과 같이 유서를 남긴다. 나는 이 글을 아내 천건희씨, 우리 아이들 데니스,데이비드,셀리나를 위해 쓴다. 이 유언서는 법적 집행을 요구하는 문서라기보다는 나의 사적인 소망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1.1986년 10월 현재, 우리 총 자산은 약10만 달러다. 당죄 예금 저금 계좌에 2만 달러가 있고, 할아버지 안락의자, 목조코끼리,기타 가구를 셈하면 그 값이 1만 달러는 될 것 같다. 미국에 있는 집을 오늘 판다면 은행 빚, 복덕방 수수로를 빼고도 7만달러는 될 것이다.

10만 달러가 큰 돈은 아니지만, 무시할 만한 것도 아니다. 1984년 통계에 의하면 가정당 평균 자산이 4만3백달러고 부유층인 상위 12퍼센트의 평균 자산은 12만3천달러라고 한다.
이 돈으로 햄버거 몇개를 살 수 있나 계산해 보라. 나의 유산을 가지면 네명이 아침에 두개, 점심에 두개, 저녁에 두개씩, 11년 5개월동안 사 먹을 수 있다. 햄버거도 최고급 2달러짜리로 말이다.

2. 현재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사후 처에 대한 재정적 보증과 아이들의 대학 교육에 있다. 운이 좋아 1993년까지 살 수 있다면, 막내 딸애가 졸업하는 그 해까지 나는 최선을 다해서 학비를 조달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오늘 죽는다 하더라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내가 죽게 되면 아내가 생명보험 회사로부터 나의 3년간 연봉에 해당하는 돈을 받게 되고, 이 돈을 가지면 버지니아 주립대학 재학시 아이들 셋의 4년동안 학비,숙비, 용돈의 경비를 모두 충당 할 수 있다. 아이들 교육비외에 나의 총 자산은 나의 아내에게 넘긴다.

3. 나의 시체를 어떻게 처리하는가는 너희들에게 맡긴다. 나는 화장이 좋을것 같다. 간단하고 돈도 많이 들지 않고, 또한 위엄 있는 방법인것 같다. 화장을 함으로써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이 내 허영심을 간질어 준다. 화장을 하게되면 묘지를 구한다, 시체를 파 묻는다, 벌초를 해야한다는 등의 골치 아픈 일이 없어서 좋다. 특히 비가 오고 눈이 오는 날이면 묘지 방문이 보통 고역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염라대왕이 허락해 준다면 나는 수요일에 죽고 싶다. 월요일에 죽으면 첫날부터 재수없다고 투덜댈 테고, 금요일에 죽으면 다가 오는 주말을 망치는, 미국 헌법에 어긋나는 엉터리 수작이라고 아우성을 칠까 두렵다.

4. 아내에게 부탁 드립니다. 내가 죽자마자 당신이 해야 할 의무는 내 시체가 당신에게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가를 알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보장처, 나의 전 고용인들에게 문의해서 나의 법적인 아내로서 당신이 다달이 돈을 얼마 타먹을 수 있나 알아보십시오. 법적으로 당신이 찾아 먹을 수 있는 돈을 못 받는다면 이것은 불법적인 행위요, 비애국적인 태도라고 봅니다. 차마 어떻게 죽은 남편을 이용하냐구요? 여보, 내 돈을 타먹지 않겠다면 당신은 나와 결혼한 의미가 없지 않소?
다음, 재정 고문관을 구하십시오. 우리 아이들이 3-4년 지나면 돈 관리를 곧잘 할 줄 믿습니다. 미국에서 자라 돈 냄새를 잘 맡을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밴쿠버에 사는 프로이드 틴스키나 스프링필드에 사는 김윤수씨의 조언을 구하십시오. 그들은 세심하고 어진 분들이고 돈이 있어 노파를 사기치지 않을 것입니다. 내 조카 효숙이를 믿어도 됩니다. 그 애는 빈틈없고 사업의 눈도 트인 아이입니다. 급하고 답답할 때는 조이스오링거나 옥자와 이라이에게 전화를 거십시오. 모두들 당신을 도와주려고 전력을 다할 것입니다.
제가 죽은후 재혼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좋은 생각이라고 믿습니다.[탈무드]에 의하면 여자 없는 남편은 반쪽이라고 하니까, 남자 없는 여자도 모자라는 인간이겠지요? 당신이 모자라는 인간이 된다면 저는 땅속에서 눈물을 흘릴게 아닙니까.
젊었을때 성행위가 있어야 소화가 잘 되듯이 노년에는 서로 기대고 의지할 반려자가필요합니다. 농담을 주고 받고 서로 깔깔 껄껄 웃을 수 잇는 사람을 찾아 보시오. 내가 코를 골때마다 당신에게 두통이 온다니까 먼저 코를 고느냐고 슬쩍 물어 보십시오.
오비드가 쓴 [The art of Love]이라는 책은 남편을 낚는 온갖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제발 그책을 한번 읽으십시오. 예를 들면 "장례식은 꼭 우울해야만 된다는 법은 없고, 오히려 이곳을 새 로맨스의 시발점으로 생각하라"고 도사 선생님은 말씀하십니다.
"진심에서든 인위적이든 당신은 슬픔을 가정하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만 하면 됩니다"라는 것은 눈물을 흘리는 여인보다 이 세상에서 더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여자는 없기 때문입니다.장례식이 끝나기도 전에 조객으로 온 신사 홀아비가 당신과 화촉을 밝히자고 제안해 올 수도 있습니다.
재혼을 할 경우 남편과 살은 섞되 은행장부는 섞지 마십시오. 유언을 남길 경우 당신 재산의 최소한 반을 아이들 명의로 남기십시오. 깨지기 쉬운 달걀을 모두 한 바구니 속에 담는다는 것은 좀 위험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 아이들과 좋은 친분을 유지하십시오. 애들이 커서 결혼하여 자기 자식을 키우게 될때야 정말 어머니가 얼마나 훌륭하셨는지 깨닫게 됩니다. 내 자식을 길러보지 않은 사람은 부모를 진실로 존경하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그러니 아이들이 너무 철이 안났다고 실망하지는 마십시오. 손자 손녀들이 생기면 꼬마들에게 한국 말을 가르쳐 주면서 소일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럴 경우 수업료를 단단히 받을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럼 복 받고 운수가 트이기를 바랍니다. 자연이 준 온갖 선물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운이 아닌가 합니다. 몸조심 하시고 틈 나는대로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서 건강 진단을 받으십시오.

5. 우리 아이들에게

a)건강은 인생에서 행복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몸 간수를 잘하기 바란다. 데니스 녀석은 정신이 없어 오토바이에 치였는데 앞으로 조심하고, 데이비드는 특히 눈 간수를 잘해서 시력을 보호해야 한다.

마약에 손대지 말고 담배를 피지 말아라. 나는 담배를 너무 피운탓에 폐가 망가져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운전은 조심스럽게 하고 난폭한 운전사는 피하기 바란다.

미국은 자유의 국가인지라 국민들이 4백만개의 권총을 가지고 있다. 총알에 맞아 죽는 데도 꼭 이유가 있어서만은 아니다. 코푸는데 너무 소리를 크게 냈다고 총에 맞아 죽고,옆집 아주머니에게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할때 지나치게 미소를 띄어도 피살당 할 수 있다.

중국의 성인 노래자는 죽음이 닥쳐왓을때 나체로 거울 앞에 서서 돌아가신 부모님의 부르며, 자신은 당신이 주신 몸을 단 한개의 상처, 단한개의 할큄도 없이 보전해 왔노라 했다. 이런 애기를 하는 이유는 건강은 개개인의 행복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일뿐만 아니라 효도의 첫 조건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이다.

b)누구나 학교 가기를 싫어한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이 최소한 4년제 대학을 졸업할 것을 분부한다. 접시닦이를 하면서도 보람있게 생계를 유지하고 아이들을 대학에 보낼 수 있는 복 받은 나라가 미국이다. 그런데 왜 돈을 쏟아 부으면서 골치 아픈 대학 공부를 해야 되느냐고? 학위는 더 넓은 기회를 의미한다. 헌법에서는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태어났다고 말하지만 대학 졸업생은 더욱더 동등한 것 같다. 학위 없이는 생존경쟁의 출발점에서 나서지 못할 수도 있다.

대학 교육의 멋은 졸업장을 받은 뒤에도 네가 소망하는 대로 접시닦이를 할 수도 있고 쓰레기 청소부도 할 수 있다는데 있다. 무엇보다도 대학 생활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과 같이 좀 겁도 나고 어지럽기도 하지만 몸이 오싹오싹하고 짜릿짜릿하게 신나는 경험이다. 한번 타 보고 인생 경주의 승차권을 한 장 얻기 바란다.

c)너희들은 모두 그 어느날 결혼하기를 원하겠지. 몇 천년동안 사람은 결혼하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혼자 사는 것이 좋은가,하고 핏대를 올리며 거론했다. 악덕한 부인과 결혼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

"결혼을 해도 후회하고 결혼을 하지 않아도 후회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나는 결혼을 권장하고 싶다. 착한 부인을 만나면 당신은 행복할 것이요, 나같이 악덕한 부인을 만나면 당신은 철학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동감한다. 그러나 오직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 결혼하지는 말길 바란다.

배필 선택의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모두 말하기를 여기엔 과학적인 방법이 없다고 한다. 바보천치도 쉽게 정열적인 사랑에 빠질 수 있다. 문제는 일단 사랑에 빠지면 이를 어떻게 계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느냐에 있다. 흔히 사랑은 영원하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 통계에 의하면 두 달 짜리도 있고 60년 짜리도 있는 것 같다. 가장 그럴듯한 충고는 시인 로버트 푸르스트의 말이다.

"결혼하기 전에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일단 결혼을 한 뒤에는 한 눈을 지그시 감아야 한다."

결혼은 행복의 동의어가 아니다. 네가 결혼한다고 해서 행복이 신사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네 앞에 와서 절을 해 주길 바라는 것은 얼빠진 생각이다. 행복(幸福)이란, 글자 그대로 '요행'이요, '복'을 뜻한다. 이를테면 행복은 대체로 운인데 그 누구도 뇌물을 주어 운의 관심을 끄는 방법을 모른다. 결혼이란 단순히 자연이 마련한 인류종족 보전의 한 수단이지 행복과 불행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

결혼은 남편과 부인과의 관계가 아니라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다. 그러면서도 한없이 보람있는 경험이 결혼이다. 행복이란 내 자식들이 자라는 것을 본다는 것, 데니스가 터치다운을 하는 것을 보고, 데이비드가 여드름과 싸우는 것을 보고, 셀리나가 연지도 찍어 보고 곤지도 발라보는 것을 보는데 있다.

오래살아서 그 어느날 손자 손녀들이 재롱떠는 것을 보고 싶다. 어린애들을 모아 할아버지에게 인사 드리는 방법도 가르쳐 주고 싶다. 그러나 늙는데도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인생은 릴레이 경주요, 내가 내 몫을 뛰고 배턴을 다음 경주자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이것은 보통 재미가 아니다.

d)일생 동안 나는 돈을 살짝 멸시해 왔다. 아마도 돈을 버는 재주가 없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돈을 많이 긁어모은다는 것은 악이다. 돈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많이 챙긴다는 것은 위험한 짓이다. 돈은 도둑과 사기꾼을 끌어들이고 자객의 손에 칼자루를 쥐여 준다. 솔직히 말해서 너무 부자가 되지 말라고 경고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은 편리하다. 돈은 세칭 휴대용 행복이라고 한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에 의하면 늙으면 벗님이 셋밖에 없는데 늙은 마누라, 늙은 개, 손에 쥔 현금이라고 했다. 그러니 이 말도 참고하기를 바란다.

그 옛날 내가 직장을 잃어 너희들에게 용돈을 줄 수 없었을때 너희들이 몇 푼 벌겠다고 거리에 나가 맥주 깡통을 주워다 팔던 일을 기억하는지? 가난은 사람을 천하게 만든다. 그때 나는 술을 심하게 마시게 되었다.

가난했던 그날이 우리에게 가져온 축복이 있었다면 그것은 너희들 어머니가 하나님의 은총을 찾았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하나님도 우리 아침상에 계란과 베이컨을 가져다 주시진 않았다.

돈은 편리해서 좋다. 내가 너희들에게 많은 돈을 남겨 줄 형편이 못 되어 이렇게 장황한 설교를 하기로 했다. 젊었을 때부터 살 만큼 돈을 벌어 두는 것이 좋을 거야.

그의 유서중 마지막 부분...

6. 나는 1959년에 미국에 왔다. 여행 가방하나 없이 주머니엔 35달러밖에 없었던 스물일곱 살의 초라한 나그네였다. 그러다가 우물쭈물 대학 교육을 마치고 착한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복을 받아 훌륭한 세 아이를 낳았다. 그 후 다행히 큰 곤욕을 겪지 않고 살아와서 지금 이 유언서를 쓰고 있다.

아내도 만족해 하는 눈치여서 나는 기분이 좋다. 아이들도 제법 자라서 철이 났는지 부모를 용서해 줄 아량을 보여주니 대견하기 짝이 없다. 생각해 보면 나는 한없는 행운아, 은하수에 숨어 있는 별님 하나가 나의 행운을 보살펴 준 것 같다. 또한 내가 어렸을때보다 나의 자식들에게 더욱 더 많은 기회를 줄 수 있다는데 한없는 고마움을 느낀다.

나는 인생이 무엇인지 몰랐다. 태어났으니까 살아야 된다는 것 뿐이었다. 내가 지금 데이비드 정도의 나이였을때 나는 원치도 않았는데 나를 낳아았다고 부모님을 많이 원망했었다. 키가 좀더 크고, 좀 더 미남이었으면 했다. 도회지에서 돈 많은 부모님한테서 태어 났으면 했다.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고 물어도 보았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아직도 데니스의 키가 좀 컸더라면 프로 미식 축구 팀에 뽑혀 갈 수 있지 않았을까, 데이비드는 왜 난시로 태어났을까, 셀리스는 왜 수학 천재가 아닐까 하고 의아해 하는 점이 많다.

너희들도 지금 만약 이랬다면,하고 아쉬워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희들이 미국 시민으로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너희들이 싱가포르에서 불행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네팦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서머셋 몸은 인생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인생은 정해진 규칙을 질의하지 않는 한, 하나의 장기 두기와 같다고 주장하고 싶다. 상(象)은 왜 옆걸음을 치고, 차(車)는 왜 똑바로만 갈 수 있고, 포(包)는 왜 넘어야만 되는가 하고 사람들은 묻지 않는다. 이 규칙은 무조건 받아들여야만 되고 그래야만 게임을 할 수 있다. 규칙에 대해서 불평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의 명언을 받아들인다면 인생은 한없이 아름다운 것이다. 나는 인생을 유람선을 타는데 비유하고 싶다. 텔레비젼에 나오는 사랑의 유람선(Love Boat)처럼 저마다 어느때 어느곳에서 배를 탄다. 배가 이곳 저곳을 한가로이 순항할때 승객들은 변하는 풍경을 즐기고 새로운 항구에 정박할 때마다 새로 타는 승객들을 환영한다.

선상에서 친구도 사귀고 노름도 하면서 돈을 잃기도 하고 따기도 한다. 술도 마시고 춤도 춘다. 아니면 선창 소파에 누워 햇빛 세례를 받으며 아가사 크리스트이 추리소설을 읽은 후, 춤 한번 추자고 했더니 거절한 금발 계집애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무서운 계획도 짜 본다.

하지만 다음 순간 진수성찬의 저녁상을 받자 살인 계획을 잊어 버린다. 허허하고 너털웃음을 지어보고, 배가 유유히 지날때 일어나는 거품속에 우리는 삶의 슬픔과 괴로움을 씻어 버린다.

유람선 여행은 참 재미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우리는 새 승객을 위해서 하선을 해야 한다. 약속된 일정이 끝났기 때문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유람이었던가! 우리는 유람의 기회를 얻을 걸 고마워하면서 후회없이 하선을 한다. 이 유람에서 제일 고맙고 아름다운 일은 그 누군가 나에게 공짜표를 거저 선사해 주었다는데 있다. 이것이 인생이 아닐까. 제발 유람을 즐기십시오.

나의 유람은 거의 끝나가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참으로 이 유람을 즐겼다. 배안에서 재미있는 사람들을 여럿 사귀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들은 천건희씨, 데니스, 데이비드, 셀리나였다. 이 자리를 떠나면서 나는 여러분을 상면할 수 있는 행운을 가진데 대해 심심한 감사를 포하고 앞으로 끝까지 즐거운 유람을 하기를 축원한다.

내가 죽은 뒤 땅 속에 묻히게 된다면 비문을 어떻게 써 달라고 할까 생각해 봤다. 심사숙고 끝에 이런 글이 어떨까 생각했다.

"이 땅에 충청도 촌놈이 묻혔습니다. 그의 일생 소원은 사람들이 착각하여 그를 서울 신사로 보아 주었으면 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니 좀 유치한 것 같아서 멘켐(H.L. Menkem)의 비문을 꾸어다 쓸까 한다.

"내가 이 속세를 뜬 뒤, 나를 아직도 기억하고, 내 유령을 즐겁게 해 주겠다는 분이 있으면, 죄인을 용서하고 못생긴 아가씨에게도 윙크를 던져 주십시오."

그럼 소인은 물러 갑니다. 오래오래, 길이길이 잘 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