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글 Lv. 3

세상에서 가장 매운 고추

Ikarus 2017. 6. 22. 09:04

이곳의 음식들 중에는 매콤한 소스를 곁들여 먹는 음식들이 많습니다.


며칠전 옆자리의 현지 직원과 매콤한 이곳 음식 이야기로 수다를 떨던 중에 한국에도 고추를 사용한 스파이시한 음식이 많고 할라피뇨에 버금가는 "아주 아주 매운 고추"가 있다는 자랑아닌 자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너희들이 청양 고추의 매운 맛을 알어~ 하는 묘한 근거없는 승리감? 같은 것을 느끼면서 말이죠.


그런데 이 말을 들은 그 직원은 왠지 피식 웃으며 할라피뇨 정도로는 맵다고 말 할 수가 없다며 우리의 청양고추까지 도매금으로 싸잡아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해 살짝 기분이 상습니다. 그래서 질 수 없다는 쓸데없는 오기가 생겨 설마 네가 말하는 대단하게 매운 고추의 맛이라는 것이 하바네로를 말한는 것이냐라며 제가 알고 있던 가장 매운 고추 이름을 대며, 하바네로 정도라면 청양고추를 한 수 접어 줄 수도 있지 하는 역시 전혀 맥락없는 호기를 부렸습니다. 


탐스럽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극악의 매움을 자랑하는 하바네로 고추.


근거없이 호기로운 제 말에 그 직원은 '하바네로쯤은 매운 고추 축에도 못끼지'라고 일축하며 "자네 스코빌 척도 (Scoville scale)라고 들어는 보았는가 ?"라며 느닷없이 전문적인 용어를 구사하며 후욱~ 역공을 들어왔습니다.  


세상에나, 세상은 넓고 매운 고추는 많다더니, 정말 그 직원의 말대로 청양고추나 할라피뇨는 드넓은 고추의 강호(삐~ 왠지 15금?)에선 한낱 존재감 약한 밍밍한 하수에 불과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 고추의 자존심(다시 15금?) 청양고추의 무려 250배에 달하는 극악의 매운 맛을 자랑하는, 세상에서 가장 매운 고추 1-2위에는 이 나라의 이름 Trinidad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 현지 직원의 자부심의 근원은 세상에서 가장 매운 고추가 이 나라 특산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Scoville Heat Unit (SHU)으로 불리는 스코빌 매움 단위는 고추의 팹사이신 양을 측정하는 오래된 방법으로 지금은 훨씬 더 정확한 분석 기술이 있지만 아직도 고추의 매운 맛을 비교할때 많이 쓰이는 전통적인 단위입니다. 아무리 측정된 객관적 비교라 하더라도 청양고추의 250배라는 매움의 정도는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매운 것이기에?


그 직원은 지난주 어디서 구해 왔는지 Trinidad Moruga Scorpion 고추 한봉지를 제게 선물로 안기며 그 "고추를 만지고 난 후에는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한다"며 신신당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그것(?!)을 만지고 난 후 손을 씻는 것은 상식 아닌가?



음. 보기만 해도 알싸한 매운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온다고나 할까 우선 생긴 외모부터 우리나라 청양고추처럼 초록초록~ 단정한 모범생 같지 않고 우락부락한 불량배 마냥 험악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 우악스럽게 못생긴 고추를 제게 안긴 것은 아마도 맥심 커피 믹스를 초반에 맛만 보여주고 혼자 타 먹는 저를 독살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의심이 갔지만 도대체 얼마나 맵다고 저리 자랑을 하는 걸까하는 참지 못할 호기심에 끌려 그 중 하나를 맛보기로 했습니다. 사진속의 고추중 하나를 골라 호기롭게 반으로 자르고 맛을 보려는 찰라, 걱정스레 저를 보고있던 그 직원의 눈가를 스치듯 지나가는 당혹스런 떨림은 "생명은 소중한 것이여"라는 깨달음을 퍼득 떠오르게 했습니다. 그래서 맛을 보는 대신 마음을 바꿔 먹고 대신 살짝 핥아만 보기로 했습니다. 


도대체 뭐가 맵다는 거야? 기대와는 달리 실망스러운, 달착지근한 듯한 첫 키스의 날카로운 추억이 여운처럼 남아있던 짧은 몇초가 지나자, 마치 입안에서 세인트 헬렌즈 화산이 푹발하듯 불 타오르는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건 그냥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이 아니라 폭발하듯 대기권을 뚫고 달까지 치솟아 오를 것만 같은 무자비하고 맹렬한 폭발적인 느낌이었습니다.

분명 한번 살짝 핥았을 뿐인데 입을 포함한 얼굴의 절반이 얼얼해지며 그리즐리 베어에게 좌우연타 쌍발 따귀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지고 화끈 달아 올라 이마에서 타조알 같은 땀방울들이 산사태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이, 과연 세계 1위라는 타이틀이 명불허전 이었습니다.   


이 고추로 만든 악마의 맛 핫소스.


이렇게 극악의 매운 고추를 음식에 넣는 다는 것은 나를 포함한 누군가를 독살하고 말겠다는 확고한 의지 표현의 다름이 아니라 느껴져, 요리에 쓰는 것은 포기하고 대체재로 이 고추로 만든 핫소스를 찾아 보기로 했습니다. 액체 상태의 핫소스는 그 양에 따라 매운 맛을 조절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지극히 과학적인 상식을 바탕으로 한 전략적 선택이었는데 이 또한 이 고추를 얕잡아 본 알팍한 꼼수에 불과였단 것을 깨달았습니다.


동네 중국집에서 사온 전혀 매운 맛이 없는 정체불명의 All in one (이라 쓰고 잡탕이라 읽는다) 스프에 사진의 핫소스 두방울을 넣고 휘휘저은 후 국물을 한 숟가락 뜨자마자 컥~하고 재채기가 나며 예전 학생시절 5월의 꽃바람에 실려 오던 건조하고 까칠하게 매캐했던 최루탄 냄새가 떠 올랐습니다. 아무리 봐도 이건 식용을 목적으로 만든 핫소스가 아니라 그냥 거의 공업용 캡사이신 농축액 같습니다.

멋 모르고 산 다섯 병을 끼니때마다 한 두 방울씩만 넣어서 먹으려면 몇년을 먹어도 다 못 먹을 듯하여, 아무래도 평소 감정이 좋지 않았던 얄미웠던 사람들에게 화해의 선물로 나누어 주면 아주 만족스러울 것 같습니다.



P.S 현재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는 세계에서 가장 매운 고추는 Carolina Ripper (aka  HP22B, HP22BNH7 & HP22BNH)라는 고추로 Trinidad Moruga Scorpion 보다 2십만(200,000) SHU가 더 매운 이백이십만(2,200,000) SHU를 자랑하며 2013년 기네스북에 매운 고추 1위로 등극했습니다. 그런데 이 고추는 자연상태에 존재하던 고추가 아니라 12년간의 노력을 걸쳐 미국에서 잡종 교배를 통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고추입니다. 각고의 노력을 통해 만든분께는 죄송하지만 이런게 왜 필요했을까요?


현존 지구최강 매운 고추 Carolina Ripper (200,000 SH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