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마시면 삼백잔은 마셔야 하지 않겠는가?
저녁을 먹고 8시쯤 술자리를 시작하면 10시가 될때까지는 시간이 왜 이리도 더디게 가는지...그 동안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해서 직장 이야기며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큰 애 이야기를 시시콜콜히 늘어 놓아도 시계 바늘은 더디기도 한다.
하지만 한잔이 두잔이 되고 두잔이 석잔이 되서 10시를 넘어가면 자리는 비로소 새벽녘의 어시장 마냥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미국 대출시장 위기가 한국경제에 미칠 영향에 대한 토론을 시작으로 딴나라당 경선이 세계 평화에 미칠 영향에 대한 열띤 설왕설래을 거쳐 지금 어느 회사 주식을 사면 일확천금을 할 수 있다는 근거없는 내부 정보까지 안주로 등장하게 된다. 이런 대화들이 중반을 지날 무렵 시간은 비행기가 활주로를 이륙하듯 거침없이 가속 질주하기 시작해 12시 통금시간에 걸려 버린 오합지졸들이 하나 둘 집으로 퇴장하면 남은 소수 정예들은 3차, 4차 "콜"를 외치며 고삐 풀린 폭주를 시작한다.
이쯤 되면 화제는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학창 시절 이야기를 시작으로, 월남 스키부대에서 람보와 같이 근무하던 무용담이며 지금은 남의 아이의 엄마가 되어버린 옛 얘인의 이야기까지, 다양하지만 매번 정해진 레파토리를 섭렵하며 짧은 한 마디 소견을 피력하고 나면 한 시간이 우습게 지나 버리는, 시간 왜곡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다 익숙한 거실 쇼파 위에 공간 이동해 어제 아침 출근길 모습 그대로 잠든 자신을 발견하면 숙취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옛 성현의 노래를 목놓아 부르게 된다.
이백의 장진주.
주가(酒家)의 거봉 이백께서는 일찌기 會須一飮三百杯(회수일음삼백배)라 일갈 하셨다.
한번 마시면 삼백잔은 마셔야 하지 않겠는가?...소주로 따지면 소주 마흔 세병은 마셔야 한잔 술을 했다한다니...과연 득주(得酒)의 길은 정녕 그리 멀고도 아득하단 말인가?
將進酒(장진주)
: 술을 올리려네 -이백
君不見,(군부견)
: 그대는 보지 못 했는가
黃河之水天上來(황하지수천상내)
: 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내려
奔流到海不復回(분류도해부복회)
: 힘차게 흘러 바다에 이르러 다시 오지 못 하는 것을
君不見,(군부견)
: 그대는 보지 못 했는가
高堂明鏡悲白髮(고당명경비백발)
: 높은 집 거울 앞에 흰 머리 슬퍼하느니
朝如靑絲暮成雪(조여청사모성설)
: 아침에 검푸른 머리 저녁에 눈같이 희어진 것을
人生得意須盡歡(인생득의수진환)
: 인생이 잘 풀릴 때 즐거움 다 누리고
莫使金樽空對月(막사금준공대월)
: 금 술잔 헛되이 달과 마주보게 하지 말라.
天生我材必有用(천생아재필유용)
: 하늘이 내게 주신 재주 반드시 쓰일 것이며
千金散盡還復來(천금산진환복내)
: 많은 돈을 다 쓰버리더라도 다시 생겨나리라
烹羊宰牛且爲樂(팽양재우차위낙)
: 양고기 삶고 소 잡아 또 즐기리니
會須一飮三百杯(회수일음삼백배)
: 모름지기 한 번 마시면 삼백잔은 마셔야 하리라.
岑夫子,丹丘生(잠부자,단구생)
: 잠부자, 단구생이여
將進酒,君莫停(장진주,군막정)
: 술을 올리려하니, 그대들은 거절하지 말게나
與君歌一曲(여군가일곡)
: 내 그대들에게 노래 한 곡 불러주려하거니
請君爲我側耳聽(청군위아측이청)
: 그대들 나 위해 귀 좀 기울여 주게나
鐘鼓饌玉不足貴(종고찬옥부족귀)
: 음악과 귀한 안주 아끼지 말고
但愿長醉不愿醒(단원장취부원성)
: 부디 오래 취하여, 제발 깨지 말았으면 좋겠네
古來聖賢皆寂寞(고내성현개적막)
: 옛날의 성현군자들은 다 잊혀지고
惟有飮者留其名(유유음자류기명)
: 술꾼만 이름을 남겼다네
陳王昔時宴平樂(진왕석시연평낙)
: 진왕은 그 옛날 평락궁 잔치 열고서
斗酒十千恣歡謔(두주십천자환학)
: 한 말에 만량이나 하는 술 마음대로 즐겼다네
主人何爲言少錢(주인하위언소전)
: 주인은 어찌하여 돈이 적다 말하리오
徑須沽取對君酌(경수고취대군작)
: 모름지기 빨리 사 와서 그대와 대작하리라
五花馬,(오화마)
: 오화마
千金?,(천금구)
: 천금구를
呼兒將出換美酒(호아장출환미주)
: 아이 불러 맛있는 술로 바꿔오리니
與爾同消萬古愁(여이동소만고수)
: 자네들과 함께 하며 만고의 시름을 삭여보자꾸나
성현의 시대에는 현찰이 바닥나면 말과 보물을 팔아 술을 마셨고 이제는 카드를 긁어 술을 마시니 주당의 세계도 도도한 시대의 흐름 앞에선 속절없이 바뀌어 가나보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있으니 말과 보물을 팔아 술을 마시던 시대에도, 카드를 긁어 술을 마시는 오늘날도, 다음날 아침 부릅뜬 두눈에서 시퍼런 안광(眼光)을 레이저처럼 마구 마구 발사하시는 마눌님의 분기탱천한 시선은 성현께서도 어찌 하시질 못하셨을 듯 하다.
하지만 "자네들과 함께 하며 만고의 시름을 삭여 보자"하시는 성현의 애절한 가르침은 시공간을 뛰어 넘어 오늘도 잔을 드는 주당들의 심금을 울린다. 그 한잔에 오늘을 잊고 비틀거리는 뒷모습으로 내일을 향해 걷는 우리의 모습을 술로서 도를 깨우쳤다는 주성(酒聖)들께 감히 비하기가 너무도 외람되지만 한잔에 의지해 현실을 위로 받으려는 우리에게 그 길은 아득하고 성스럽기만 하다.
술을 너무도 사랑하여 끝내 귀천의 도를 이루었다는 천상병 시인같은 분만이 그 길에 가까이 다가간 분이라 할 수 있을까?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마시다 정녕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고 하늘로 돌아 가려면 얼마나 마셔야 한단 말인가? 삼백잔은 마셔야 술 한 잔 했다고 할 수 있다는데 요즘 소주는 병이 작고 맛은 물을 닮아 밍밍하기만하다.주성(酒聖) 이백께서도 이런 소주로 삼백잔을 말씀 하시진 않으셨으리라.
술을 마시다보면 부끄러워진다.
만 이십사년 일개월을 살고도 부끄러웠다는 윤동주님에 비해 십몇년 몇달을 더 살고도 술 마시지 않고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나는 얼마나 더 많이 나를 닦아야 하는 걸까?
윤동주님이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았다는 청동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 당당하려면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 걸까?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滿)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
―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나 자신에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때쯤 나도 청동거울에 비친 나를 벗삼아 술 한잔 기울이며 술 삼백잔의 호기를 부려보고 싶다.
시인 조지훈은 당대의 '주선'이라 자처하며 주도의 18단계를 밝혀 놓았다.
주도유단설
조지훈
(조지훈(趙芝薰)의 '술은 인정이라')
술을 마시면 누구나 다 기고만장(氣高萬丈)하여 영웅호걸이 되고 위인현사(偉人賢士)도 안중에 없는 법이다. 그래서 주정만 하면 다 주정이 되는 줄 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주정을 보고 그사람의 인품과 직업은 물론 그 사람의 주력(酒歷)과 주력(酒力)을 당장 알아낼 수 있다. 주정도 교양이다. 많이 안다고 해서 다 교양이 높은 것이 아니듯이 많이 마시고 많이 떠드는 것만으로 주격(酒格)은 높아지지 않는다. 주도에도 엄연히 단(段)이 있다는 말이다.
첫째 술을 마신 연륜이 문제요,
둘째 같이 술을 마신 친구가 문제요,
셋째는 마신 기회가 문제며,
넷째 술을 마신 동기,
다섯째 술버릇,
이런 것을 종합해 보면 그 단의 높이가 어떤 것인가를 알수 있다.
음주에는 무릇18의 계단이 있다.
1. 부주(不酒) 술을 아주 못 먹진 않으나 안먹는 사람 --9급
2. 외주(畏酒) 술을 마시긴 마시나 술을 겁내는 사람 --8급
3. 민주(憫酒)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으나 취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기는 사람 --7급
4. 은주(隱酒)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고 취할 줄도 알지만 돈이 아쉬워서 혼자 숨어 마시는 사람 --6급
5. 상주(商酒) 마실 줄 알고 좋아도 하면서 무슨 잇(利)속이 있을때만 술을 내는 사람 -- 5급
6. 색주(色酒) 성생활을 위하여 술을 마시는 사람 --4급
7. 반주(飯酒) 밥맛을 돕기 위해서 마시는 사람 --3급
8. 학주(學酒) 술의 진경(眞境)을 배우는 사람(酒卒) --2급
9. 수주(睡酒) 잠이 안와서 술을 먹는 사람 --1급
10. 애주(愛酒) 술의 취미를 맛보는 사람 --初단
11. 기주(嗜酒) 술의 진미에 반한 사람(酒客) -- 二단
12. 탐주(耽酒) 술의 진경(眞境)을 체득한 사람(酒境) --三단
13. 폭주(暴酒) 주도(酒道)를 수련(修練)하는 사람 --四단
14. 장주(長酒) 주도 삼매(三昧)에 든 사람(酒仙) -- 五단
15. 석주(惜酒) 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사람(酒賢) -- 六단
16. 낙주(樂酒)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사람(酒聖) -- 七단
17. 관주(觀酒) 술을 보고 즐거워 하되 이미 마실 수는 없는 사람(酒宗) -- 八단
18. 폐주(廢酒) 열반주(涅槃酒), 술로 말미암아 다른 술 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 -- 九단
부주, 외주, 민주, 은주는 술의 진경, 진미를 모르는 사람들이요,
상주, 색주, 수주, 반주는 목적을 위하여 마시는 술이니 술의 진체(眞諦)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학주의 자리에 이르러 비로소 주도 초급을 주고, 주졸(酒卒)이란 칭호를 줄 수 있다.
반주는 2급이요, 차례로 내려가서 부주가 9급이니 그 이하는 척주(斥酒), 반(反)주당들이다.
대주, 기주, 탐주, 폭주는 술의 진미, 진경을 통달한 사람이요,
장주, 석주, 낙주, 관주는 술의 진미를 체득하고 다시 한번 넘어서 임운목적(任運目適)하는 사람들이다.
애주의 자리에 이르러 비로소 주도의 초단을 주고, 주도(酒徒)란 칭호를 줄 수 있다.
기주가 2단이요, 차례로 올라가서 열반주가 9단으로 명인급이다.
그 이상은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니니 단을 매길 수 없다.
그러나 주도의 단은 때와 곳에 따라, 그 질량의 조건에 따라 비약이 심하고 강등이 심하다. 다만 이 대강령만은 확고한 것이니 유단의 실력을 얻자면 수업료가 기백만금이 들것이요, 수행연한(修行年限)이 또한 기십 년이 필요할 것이다.(단 천재는 차한에 부재(不在)이다.)
요즘 바둑열이 왕성하여 도처에 기원(棋院)이다. 주도열(酒道熱)은 그보담 훨씬 먼저인 태초 이래로 지금까지 쇠미(衰微)한 적이 없지만 난세(亂世)는 사도(斯道)마저 타락케 하여 질적 저하가 심하다. 내 비록 학주(學酒)의 소졸(小卒)이지만 아마투어 주원(酒院)의 사절(師節)쯤은 능히 감당할 수 있건만 20年 정진에 겨우 초급으로 이미 몸은 관주(觀酒)의 경(境)에 있으니 돌돌 인생사(人生事) 한(恨)도 많음이여!
술 이야기를 써서 생기는 고료는 술마시기 위한 주전(酒錢)을 삼는 것이 제격이다. 글쓰기보다는 술 마시는 것이 훨씬 쉽고 글 쓰는 재미보다도 술 마시는 재미가 더 깊은 것을 깨달은 사람은 글이고 무엇이고 만사휴의(萬事休矣)다.
술 좋아하는 사람 쳐놓고 악인이 없다는 것은 그만치 술꾼이란 만사에 악착같이 달라붙지 않고 흔들거리기 때문이요, 그 때문에 모든 일에 야무지지 못하다. 음주유단(飮酒有段)! 고단(高段)도 많지만 학주(學酒)의 경(境)이 최고경지(最高境地)라고 보는 나의 졸견(拙見)은 내가 아직 세속의 망념을 다 씻어 버리지 못한 탓이다. 주도(酒道)의 정견(正見)에서 보면 공리론적(功利論的) 경향이라 하리라, 천하의 호주(好酒) 동호자(同好者) 제씨의 의견은 약하(若何)오.
1956년 東卓 趙芝薰 (1956년 3월 "신태양" 에 기고한 수필)
술이 나를 마시더라도 부끄럽지 않으려면 기백만금의 수업료와 기십년의 수행연한이 걸린다니 나 같이 평범한 범인(凡人)은 그냥 조용히 앉아 기울이는 한잔 술로 만족해야 할 것만 같다.